축구 역사에서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이나 우승 트로피의 개수를 뛰어넘는 영향력을 발휘한 선수들이 있다. 박지성은 특히 한국 축구의 맥락에서 볼 때 그러한 인물 중 하나이다. 불굴의 의지와 근면성으로 대표되는 박지성의 커리어는 유럽 리그에서 아시아 축구 선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번 포스팅은 한국의 레전드 중 한 명인 박지성의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성장과정
박지성은 1981년 3월 30일 서울 신림동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서울에 정착하지는 못하고 부친의 사정으로 전라남도 고흥에서 자라게 된다. 그의 부친 박성종 씨는 그가 착실한 공무원이 되어 살길 바랬으나, 운동을 좋아한 그의 꿈은 축구선수가 아닌 야구선수였다. 축구를 시작한 계기는 고흥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간 후 그 지역의 산남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박지성은 그곳 야구부에 입단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4학년이 되어야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고 다시 그는 수원의 세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전학을 간 그곳은 야구부가 없었고, 축구부가 창단하는 해여서 축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그곳에 야구부가 있었다면 우린 박지성을 축구장 대신 야구장에서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운동을 좋아한 그는 축구에도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 졸업을 할 때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축구영재상인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중학교에서도 축구부 생활을 이어가서 수원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레벨은 하늘과 땅 차이였고, 그는 왜소한 체격으로 힘든 축구부 생활을 했지만 특유의 성실함으로 명지대 진학에 성공한다. 대학교에서 박지성은 경기 조율 능력과 정확한 패스를 모두 갖춘 미드필더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U-23 대표팀에도 발탁되게 되고, 거기다 2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2000년 일본의 교토퍼플 상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되어 프로선수생활을 시작한다.
초기 커리어
교토 퍼플상가에서 활약하던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하이라이트가 되는 시절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2002년 한일월드컵 최종엔트리에 뽑힌 것인데, 당시 한국 대표팀의 히딩크 감독은 주변의 반대에도 그의 활동량과 센스를 믿고 발탁한다. 그 결과 박지성은 조별예선 3차전인 포르투갈 전에서 골을 기록하게 된다. 이 골을 넣고 난 후 히딩크 감독에게 뛰어가 안기던 장면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자신을 믿어주고 발탁해 준 스승에 대한 고마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월드컵 4강이라는 경험을 하게 된 그는 대회가 끝난후 소속팀 교토 퍼플상가로 돌아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며 업그레이드된 실력을 발휘한다. 이때 교토 퍼플상가는 2부 리그 소속이었고 박지성은 네덜란드의 PSV에인트호번으로 이적이 유력했는데 자신의 계약 만료일이 지나 치르게 된 컵대회 결승전에서 그는 무보수로 출전하여 1골 1 도움을 기록하며 우승컵을 팀에 선물한다. 이 우승컵은 현재까지 구단이 보유한 유일한 우승컵이라 전해진다.
유럽 커리어 첫 클럽인 에인트호번 시절 초장기는 그에게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유럽축구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여지껏 경험했던 축구와 다른 템포에 고생하여 심지어 홈팬들에게도 야유를 받았다. 그래서 히딩크 감독은 그를 원정경기에만 출전시키기도 했다.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고 2003-2004 시즌부터 조금씩 적응하여 2004-2005 시즌에는 팀의 에이스로 거듭나며 야유를 환호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이때가 바로 그의 인생 터닝포인트라 할 수 있는데, 리옹과의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에 에시앙을 눈여겨보고 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에시앙을 관찰하기 위해 경기장에 있었는데, 그 경기에서 퍼거슨 감독은 에시앙 대신 오히려 박지성의 플레이에 빠지고 만다.
전성기 커리어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엄청난 활약으로 그는 유럽 빅 클럽의 관심을 받게 되고 결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게 된다. 어느 한번 쉬운 적 없던 그의 인생은 여기서 다시 한번 위기를 맞는다. 바로 워크퍼밋이 발급되려면 최근 2년간 열린 국가대표 경기 중 75%이상을 출장했어야 했는데 박지성은 64%밖에 안되었던 것이다. 차선책으로 유명 축구인 3명의 추천서를 받았어야 했는데 히딩크 감독. 알렉스 퍼거슨 감독, 그리고 네덜란드의 레전드 요한 크루이프가 추천서를 작성해줌으로서 워크퍼밋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요한 크루이프는 박지성과 연결점이 없었는데 챔피언스 리그에서 그의 플레이에 반해 추천서를 작성해줬다고 한다.
그렇게 입단한 명문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그는 엄청난 활동량과 체력으로 윙어의 새로운 형태, 수비형 윙어라는 평가를 듣기 시작한다. 전술적 이해도가 상당한 선수였기에 퍼거슨 감독은 그를 큰 경기에 빼놓지 않고 투입하였다.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했던 호날두와 루니와 이룬 삼각편대는 한국팬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근면성실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선수였던 그는 지독한 무릎부상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7 시즌 동안 활약하며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클럽의 최전성기를 이끈 일원으로 활약하며 205경기 27골 25 도움, 4번의 리그 우승컵 1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컵 3번의 컵대회 우승, 4번의 커뮤니티 실드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 그리고 퀸즈파크 레인저스를 거쳐 친정팀인 PSV에인트호번에 임대된 후 2014년 5월, 축구선수로서는 더 이상 활약할 수 없는 무릎상태와 본인의 판단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
플레이 스타일
2002년 월드컵 부터 다재다능함으로 주목을 받았었는데 유럽에 진출한 후 윙 포워드로 주로 뛰었다. 국가대표에서는 감독의 전술에 따라 공격형 미드필더, 또는 중앙 미드필더로서도 뛰었다. 트레이드 마크인 왕성한 활동량으로 수비에도 많이 참여하여 감독입장에서는 참 고마운 존재였다. 전방 압박도 뛰어나 과거 맨체스터 시절에는 에이스 맨 마킹 전문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축구 지능도 뛰어나 오프 더 볼 움직임은 많은 레전드들이 어린선수들을 가르칠 때 그의 플레이를 말하곤 한다. 윙어 치고는 중앙 지향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공수 밸런스를 맞추는데 아주 유용한 플레이어다.
빅클럽에서 활약한 윙어치고는 득점력이나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게 단점으로 꼽힌다. 교토에서나 에인트호번에서는 나름 공격적인 포지션을 가지고 가려했지만 맨체스터에서는 이타적인 모습을 보이며 팀을 위해 뛰었다. 전술적 으로 활용도가 어마어마한 선수였기 때문에 팬들보다는 같이 뛴 동료선수들이 그를 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선수라며 치켜세우기도 한다.
글을 마치며
그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선발로 나올때면 지구 반대편에서 하는 경기를 보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며 TV를 보던 시절이 생각난다. 경기에서 그가 골을 넣으면 내가 넣은 것처럼 기뻐했었다. 이제 세월이 지나 그를 경기장에서는 볼 수 없지만 가끔 유튜브나 TV에서 그를 볼 때면 아직도 그때의 추억이 생각난다. 무릎 연골이 다 없어지도록 뛰었다는 그를 볼 때면 측은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경기장에서 뛰어 지금의 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한국의 유망주들에겐 손흥민이 가장 유명하고 본받고 싶은 선수겠지만 손흥민도 자신의 롤모델은 박지성이라고 말한다. 은퇴 후 행정가로 활약하며 제2의 축구인생을 살고 있는 그를 영상 매체에서 더 자주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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